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요코타 메구미 (문단 편집) == 생존설 == [[북한]]은 제3차 북일실무자회의에서 요코타 메구미의 남편으로 알려진 김영남이 [[평양]]에서 가져온 요코타 메구미의 유골을 일본 측에 넘겨줬으나 '''[[DNA]] 검사 결과 요코타 메구미 본인의 것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다.''' 감식은 테이쿄 대학 법의학 연구실에서 맡았으며 유골에는 복수의 DNA가 검출되었다고 한다. 하지만 1994년까지 같은 [[납북 일본인]] 하스이케 카오루의 목격 증언과 입원했다고 알려진 49 예방원은 외국인은 들어갈 수 없었다는 [[찰스 로버트 젠킨스]]의 증언, 1995년경 [[김정일]]의 아들([[김정은]]이나 [[김정남(북한)|김정남]])에게 [[일본어]]를 가르쳤다는 목격담, 요코타 메구미가 화장된 '오봉산 화장소'가 1999년에야 건설됐다는 여타 [[탈북자]]들의 증언, [[조선로동당]]의 일본 담당자로부터 요코타 메구미가 2004년 초까지 살아 있었다고 들었다는 [[탈북자]] 이용수(가명)의 증언, 이 외에 [[함경남도]]에 있는 [[요덕 제15호 관리소|요덕수용소]]에 적어도 2003년까지 중년의 일본인 여성이 수용돼 있었다는 등 다수의 증언으로 인해 적어도 2000년대 초반까지 요코타 메구미가 생존해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나왔다. [[북한]]은 이러한 의문에 1993년 사망했다는 발표를 1994년 4월로 정정하는 행적을 보였다. || [[파일:external/s32.postimg.org/mondaiten5.jpg|width=100%]]|| || '환자 '''입퇴원''' 대장'이 너무나 허술하게 ''''사망''''으로 수정되어 있다. || || [[파일:external/s32.postimg.org/mondaiten7.jpg|width=100%]]|| || 요코타 메구미의 병원 차트 기록. 당시의 연령, 정보와 맞지 않는 부분이 다수 보였다. || 전 [[북한]] [[공작원]]이자 18살 때부터 [[한국]]에서 [[간첩]] 활동을 벌이다 체포당한 후 한국에 귀화한 김동식(金東植)의 말에 따르면 공작원 시절 연락부에 있었을 때 카메이(亀井)나 다나카(田中)라는 이름을 쓰는 일본인 교사가 있었으며 공작원들의 얼굴과 이름 등을 알고 있기 때문에 [[일본]]에 되돌려보내면 북한의 어마어마한 국가 기밀이 노출될 염려가 크다는 이유로 '사망확인서'를 조작하여 죽었다고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돌려보내지 않고 있는 것이라고 얘기했다. 이용수의 증언에 따르면 2004년 초 무렵 [[조선로동당]] 일본 담당자와 회식할 때 메구미 씨에 관해 '''"알아서는 안 될 것을 너무 많이 알았기 때문에 돌려보내고 싶어도 돌려보낼 수 없다. 실은 살아있다. 그 외에도 납치되어 온 일본 여성 4명[* 이들의 구체적인 정보는 밝히지 않았다.]은 더 알고 있다"'''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. 한 술 더 떠 2011년 11월 7일자 [[주간조선]]은 2005년 [[평양]] 시민의 데이터 중 요코타 메구미와 생년월일과 가족명이 일치하는 여성이 있다고 보도했다. 요코타 메구미는 1994년 사망한 것으로 공표되었기 때문에 논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대목. [[http://news.chosun.com/site/data/html_dir/2011/10/10/2011101000101.html|참고 기사: "납북된 메구미 2005년까지는 생존"]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